<금강경> 구경무아분 제17(究竟無我分第十七)
구경무아분 제17(究竟無我分第十七)
爾時須菩提白佛言。
그때 수보리(須菩提)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世尊。若善男子善女人。
세존(世尊)이시여, 만약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면,
云何應住云何降伏其心。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게 해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降伏)시켜야 합니까?
佛告須菩提。善男子善女人。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남자 선여인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當生如是心。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자는 마땅히 이러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我應滅度一切眾生。滅度一切眾生已。
'나는 마땅히 일체 중생(一切衆生)을 멸도(滅度)하리라.' 이와 같이 일체 중생을 멸도하였을지라도,
而無有一眾生實滅度者。何以故。
실로 멸도된 중생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若菩薩有我相人相眾生相壽者相。則非菩薩。所以者何。
만약 보살에게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다면, 그는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須菩提。實無有法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수보리야,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어떤 법(法)도 없기 때문이다."
彌勒頌曰。
미륵보살(彌勒菩薩)의 게송(偈頌)에 말씀하시되,
空生重請問 無心為自別
공(空)의 이치 깨달은 이가 거듭 질문하니, 집착 없는 마음이야말로 스스로 구별되네.
欲發菩提者 當了現前因
보리(菩提)의 마음 내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현재의 인(因)을 분명히 알라.
行悲疑似妄 用智最言真
집착으로 행하는 슬픔은 미혹일 듯하고, 지혜로 쓰는 말씀이야말로 가장 참되도다.
度生權立我 證理即無人
중생 제도 위해 방편으로 ‘나’를 세우나, 진리 증득하면 ‘사람’조차 없느니라.
須菩提。於意云何。如來於然燈佛所。
수보리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如來)가 연등불(燃燈佛) 계신 곳에서
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不也世尊。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법이 있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如我解佛所說義。佛於然燈佛所。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부처님께서는 연등불 계신 곳에서
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佛言。如是如是。須菩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어떤 법도 없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수보리야,
實無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실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어떤 법도 없다.
須菩提。若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수보리야, 만약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법이 있었다면,
然燈佛則不與我受記。汝於來世當得作佛。
연등불께서 내게 수기(授記)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너는 미래 세상에 마땅히 부처가 되리니,
號釋迦牟尼。
이름을 석가모니(釋迦牟尼)라 하리라'라고.
以實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故然燈佛與我受記作是言。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어떤 법도 없었기 때문에, 연등불께서 내게 수기하시어 말씀하시기를
汝於來世當得作佛。號釋迦牟尼。何以故。
'너는 미래 세상에 마땅히 부처가 되리니, 이름을 석가모니라 하리라' 하셨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하면,
如來者即諸法如義。
여래(如來)라는 것은 곧 모든 법의 여여(如如)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若有人言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須菩提。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한다면, 수보리야,
實無有法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須菩提。
실로 부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어떤 법도 없다. 수보리야,
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於是中無實無虛。
여래가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그 가운데 실(實)도 없고 허(虛)도 없다.
是故如來說一切法皆是佛法。須菩提。所言一切法者。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 법이 다 불법(佛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수보리야, '일체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即非一切法。是故名一切法。須菩提。
곧 '일체 법 아님'이니, 그러므로 '일체 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수보리야,
譬如人身長大。須菩提言。世尊。如來說人身長大。
비유하자면 사람의 몸이 크다고 하는 것과 같다.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크다'고 말씀하신 것은
則為非大。是名大身。須菩提。菩薩亦如是。
곧 '큰 것이 아님'이니, 그러므로 '큰 몸'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다.
若作是言。我當滅度無量眾生。則不名菩薩。
만약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하리라'고 말한다면, 그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何以須菩提。實無有法名為菩薩。
무슨 까닭인가 하면, 수보리야, 실로 '보살'이라고 이름할 만한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是故佛說一切法無我無人無眾生無壽者。須菩提。
그러므로 부처는 '일체 법은 아(我)도 없고, 인(人)도 없고, 중생(衆生)도 없고, 수자(壽者)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수보리야,
若菩薩作是念。我當莊嚴佛土。是不名菩薩。
만약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佛國土)를 장엄(莊嚴)하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何以故。如來說莊嚴佛土者。即非莊嚴。是名莊嚴。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래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말하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님'이니, 그러므로 '장엄'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須菩提。若菩薩通達無我法者。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무아법(無我法)을 통달한다면,
如來說名真是菩薩。
여래는 그를 참된 보살이라고 이름하느니라."
彌勒頌曰。
미륵보살의 게송에 말씀하시되,
人與法相待 二相本來如
사람과 법은 서로 의지하나니, 두 모습은 본래 여여하도다.
法空人是妄 人空法亦祛
법이 공하면 사람은 망령된 것이요, 사람이 공하면 법 또한 사라지네.
人法兩俱實 受記可非虛
사람과 법 둘 다 실재한다고 집착하면, 수기가 참되다 할 수 없으리.
一切皆如幻 誰言得有無
일체가 다 환(幻)과 같거늘, 누가 있어 얻음과 없음 말하리오.
<해석>
이 장은 금강경의 열일곱 번째 부분인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으로, 궁극적인 '나 없음'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보리심을 낸 이의 마음가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최고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킨 사람은 '내가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생각하되, 실제로 '내가' '어떤' 중생을 벗어나게 했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는 '나'라는 실체가 없고, '중생' 또한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 '나'라는 생각의 허망함: 만약 보살이 '나'라는 생각(아상), '남'이라는 생각(인상), '중생'이라는 생각(중생상),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생각(수자상)에 갇혀 있다면, 진정한 보살이 아닙니다. 진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어떤 고정된 '법'이나 실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 부처님의 깨달음 또한 '얻음'이 아님: 부처님께서 과거 연등불에게 깨달음을 인정받으셨을 때, 실질적으로 '어떤 법'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얻을 '법'이 있었다면, 연등불께서 미래에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래'라는 것은 모든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진리(如如)를 의미하며,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모든 법은 불법이지만 집착할 대상이 아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체 법이 곧 불법이다'라는 것은, 모든 현상이 진리의 드러남이지만, 그 현상에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크다'는 개념이 상대적인 것처럼, 모든 법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닌 이름 붙여진 것입니다.
- 보살의 올바른 마음가짐: 보살은 '내가 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하겠다'거나 '내가 불국토를 아름답게 꾸미겠다'는 생각을 가질 때, '나'와 '중생', '불국토'에 대한 집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보살은 '나'라는 실체가 없음을 깨달아, 집착 없이 중생을 돕고 불국토를 장엄합니다. '장엄한다'는 것 또한 겉으로 드러나는 꾸밈이 아니라, 본성의 청정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 무아법을 깨달은 자가 진정한 보살: 진실로 '나 없음'(無我)의 이치를 깨달은 보살이야말로 부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정한 보살입니다.
미륵보살의 게송은 이러한 '무아'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사람과 법은 서로 의존하지만 그 본성은 공하며, '나'라는 생각과 '법'이라는 대상에 대한 집착을 모두 놓아버릴 때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은 환과 같아서, 실질적으로 얻거나 잃을 것이 없다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제시합니다.
요약하자면, 이 장은 '나'라는 고정된 실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모든 존재의 공성(空性)을 깨달아, 집착 없이 자비심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진정한 보살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