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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강의>비설소설분 제21 (非說所說分 第二十一)

페이지85 2025. 5. 26. 04:39

非說所說分 第二十一
비설소설분 제21


須菩提。汝勿謂如來作是念。我當有所說法。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어떤 법을 설하려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莫作是念。何以故。若人言如來有所說法。
그렇게 생각하지 말지니, 왜냐하면 만약 누가 '여래가 법을 설하였다'고 말한다면,

即為謗佛。不能解我所說故。須菩提。
이는 곧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니, 내가 설한 바를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수보리야,

說法者無法可說。是名說法。
법을 설한다는 것은 설할 법이 없다는 것이니, 이것이 곧 법을 설함이라 한다.


爾時慧命須菩提白佛言。世尊。頗有眾生。
그때 지혜로운 목숨을 지닌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과연 어떤 중생이

於未來世聞說是法生信心不。
미래 세상에서 이 법을 듣고 믿음을 낼 자가 있겠습니까?”

佛言。須菩提。彼非眾生非不眾生。何以故。須菩提。眾生者。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그는 중생이 아니며 또한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如來說非眾生。是名眾生。
여래는 ‘중생이 아니다’라고 말한 이가 곧 ‘중생’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이 장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중생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내가 마땅히 설할 법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고 여기지 말라.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한 바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니, 내가 설한 바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법을 설하는 자는 설할 법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법을 설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여기서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고정된 형태나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만약 누군가 부처님에게 특정한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진리의 본질을 오해하는 것이며, 오히려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됩니다. 진정한 가르침은 언어와 개념을 초월하며, 그 자체로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설할 법이 없는 것'을 '법을 설한다'**고 표현하는 역설을 통해 그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지만, 손가락 자체가 달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가르침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방편일 뿐, 그 자체가 진리는 아닙니다.

 

1. 세속제(世俗諦, Conventional Truth)

세속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고 인식하는 세상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이는 언어, 개념, 사회적 합의, 그리고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 받아들이는 모든 현상들을 포함합니다. 세속제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는 데 필요한 유효한 진리입니다.

  • 특징:
    • 상대적이고 조건적입니다: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끊임없이 변하며, 특정한 조건에 의해 발생하고 소멸합니다. 예를 들어, "사과는 빨갛다"거나, "나는 한국인이다"와 같은 진술은 세속적 맥락에서 사실입니다.
    • 개념과 언어에 의존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단어와 개념은 세속적인 약속에 의해 의미를 가집니다. '나', '너', '사물', '시간', '공간' 등은 모두 우리가 편의상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 일상생활의 기반입니다: 세속제는 우리가 먹고, 자고, 일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데 필수적인 진리입니다. 의사소통과 사회 질서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환영적 측면: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세속제는 궁극적인 실체가 없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환영' 또는 '가설'의 측면을 가집니다. 마치 꿈속의 일들이 꿈속에서는 생생한 현실이지만 깨고 나면 실체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 예시:
    • "나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
    •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
    • "이 건물은 콘크리트로 지어졌다."
    • 사람들이 서로를 "나"와 "너"로 구분하는 것.

2. 진제(眞諦, Ultimate Truth)

진제는 모든 개념, 언어, 분별심을 초월한 궁극적인 실재의 참된 본성을 의미합니다. 이는 조건 없이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이며, 우리가 통념적으로 알고 있는 세상의 모습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진제의 핵심은 공(空) 사상입니다.

  • 특징:
    •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입니다: 진제는 어떤 조건이나 관계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합니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 언어를 초월합니다: 진제는 개념이나 언어로 온전히 표현될 수 없습니다. 언어는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진리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설한 바는 설한 바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 공(空)의 진리입니다: 모든 현상은 고정된 실체(자성, 自性)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라는 존재도, '사과'라는 사물도, 그 어떤 것도 독립적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본질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여 발생하고(연기, 緣起), 그 본성은 텅 비어 있습니다.
    • 열반으로 이끄는 진리입니다: 공을 깨닫는 것이 곧 번뇌에서 벗어나 열반(涅槃)에 이르는 길입니다. 진제를 체득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궁극적인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 예시:
    • '나'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으며, 단지 오온(五蘊: 물질,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의 일시적인 결합일 뿐이라는 깨달음.
    • 모든 현상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이라는 통찰.
    • 색깔, 모양, 소리 등의 개별적인 특성을 넘어선 모든 존재의 본질적인 공함.

세속제와 진제의 관계

세속제와 진제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재를 두 가지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 불이(不二)의 관계: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세속적인 현상들이 곧 공(空)의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공의 본성 안에서 세속적인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과 같은 표현으로 설명됩니다.
  • 방편과 목표: 세속제는 진제를 이해하고 깨닫기 위한 **방편(方便)**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이해 수준에 맞춰 세속적인 언어와 비유를 사용하여 법을 설하시고, 이를 통해 중생들이 점차 진제로 나아가도록 이끄셨습니다. 진제는 궁극적인 목표이자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 중도(中道): 세속제와 진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있다'는 유(有)의 견해와 '없다'는 무(無)의 견해, 즉 양 극단을 떠난 중도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세속적 현상을 부정하거나, 반대로 궁극적인 실체를 고정된 것으로 상정하는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금강경의 "설한 바는 설한 바가 아니다"라는 말은 세속적인 언어로 설해진 법이 궁극적으로는 언어를 초월한 진제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중생은 중생이 아니다"라는 말은 세속적으로는 중생이라 부르지만, 궁극적으로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진제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 두 가지 진리를 함께 이해할 때 우리는 진정한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중생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때 혜명(慧命)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미래세에 이 법을 듣고 믿음을 내는 중생이 과연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그들은 중생도 아니요, 중생이 아닌 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가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 것이니, 이것을 중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부처님은 '중생'이라는 개념 또한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중생'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은 실제로는 고정된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모든 존재가 공하다(緣起性空)**는 불교의 근본 사상과 연결됩니다. '중생'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인식과 언어의 틀 안에서 잠정적으로 이름 붙여진 것일 뿐, 그 본질은 공하기에 '중생이 아니'라고 설하지만, 편의상 '중생'이라 부른다는 의미입니다.


핵심 메시지

이 장은 궁극적인 진리가 언어와 개념을 초월한다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중생'이라는 존재조차도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우리가 이해하고 표현하는 모든 것은 임시적인 명칭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는 모든 존재의 **공성(空性)**을 깨닫고, 어떠한 고정된 생각이나 관념에도 얽매이지 않는 **무주상(無住相)**의 지혜를 증득할 것을 촉구합니다.